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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록

별을 품은 우주가 위안이 되는 원리

by 통합메일 201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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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맑은 이곳의 밤에는 어지간하면 별이 잘 보인다. 새까만 밤하늘에는 단순히 하얗게 빛나는 큼지막한 별 뿐 아니라 저것이 빛나는 것인지 아닌지 아리까리한 녀석들이 뭉쳐 일종의 성운을 만들어 보여줘서 그것은 더욱 위험하고, 더욱 야하며,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다. 이따금 나는 담배를 피우며 그런 별들을 구경하곤 한다. 별을 향해 뿜은 담배연기로 확연히 뿌연 성운을 만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실 목을 뒤로 완전히 젖혀서 바라봐야 하는 밤하늘이라는 것은 일상의 시각을 많이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수준은 아니더라도 다른 성질의 의지를 요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신이 가진, 세상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선을 잠시나마 포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무방비의 상태에 두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우선은 진부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도시와 비교해서 시골은 역시 공기가 좋구나 하는 것, 그리고 살아오면서 목격한 무수한 별들의 역사와 그 맞은편의 나의 인생. 생각나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가장 의미 있게 떠오른 기억은 2004년 초여름인가 은비누나랑 예지랑 은비누나 친구랑 제용형이랑 유성 떨어지는 거 본다고 화양동 갔던 일 정도일까 한다. 아 그리고 이렇게 그 이야기를 적어나가니 또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기는 하다. 아무튼 그렇게 기억나는 것들의 공통점은 내가 별 그 자체에 대해서 충분히 집중을 못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별을 대할 때마다 대부분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별을 제대로 마주할 만큼 충분히 외롭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진정한 고독을 향유하고 있느냐 하면 그에 대해서도 확신은 없다. 그저 지금에 있어서 아뜩한 속도로 우주로 침몰해 들어가는 찰나가 나의 마음에 하나의 각인으로 깃들 수 있던 매개가 그 상대적인 외로움이나 고독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볼 따름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마당을 걸어 나오면서 여행을 준비한다. 항로를 상실하여 영원한 우주 미아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딘가에 걸터 앉는 것이 좋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나 벤치라면 안락한 여행이 될 것이고, 기댈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좀 더 스릴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디 난간에 궁둥이라도 고정시키고 담배연기가 몇 번의 우주폭풍을 만들어 내는 동안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어느새 우주를 동공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을 여행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별을 더듬어 나가다 보면 그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아주 작은 별과 여러 별들이 모여 이루어진 별자리나 성운이 보이기 시작하고 결국은 우주 그 자체를 보게 된다. 그러한 과정의 순간순간에 나는 아뜩함을 느낀다. 그 별과 나의 거리와 우주의 광활함 때문이다. 그러한 스케일 자체가 하나의 위안으로 다가온다. 이는 꽤 신기한 현상이다. 나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기 위해서 물리적 사실로서의 우주는 얼마의 속도로 달려왔을까. 어느 순간 그렇게 나는 별과 우주 역시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그래서 우리는 마주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생의 고독을 만끽하며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향해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것, 내가 경험하고 경험해야 할 인연은 그것을 매우 닮지 않았는가. 그래서 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소멸한 별들의 기억을 직시함으로써, 서로에게 기억을 품앗이하고 있는 이들의 관계로써 나 역시 우주에 있어 하나의 위안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희망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12.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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