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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철학

대한민국 예능이 선사하는 혐오

by 통합메일 2013.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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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예능이 선사하는 혐오


 

사회문제 의식 레포트,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점에는 무엇이 있는가? 다양한 문제들이 있겠지만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TV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가진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싶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그러한 예능을 받아들인다. 예능은 비판적인 시각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 밀접하면 할 수록 그것은 사회적 문제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고, 특히 나는 내가 가진 취향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을 풀어나간다. <취향>이라는 것은 개인의 범주이지만 그것이 딛고 있는 가치는 충분히 사회적일 수 있는바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모종의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유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이 글은 일반화의 오류를 어느 정도는 피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머리말: 예능 혐오

2.혐오의 이유 1: 폭력성

3.혐오의 이유 2: 자막

4.맺는말: 일반화의 문제

 

1.머리말

사람에게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 혹은 환경적 특수성의 의거하여 그의 정체성이 개성을 확보해 나감으로써 자아의 내외부에 점점 뚜렷해져가는 선택의 기준 혹은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우리는 보통 이러한 취향에 대하여 그것은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어느 것을 선호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좋아하는 것이 그의 취향을 구성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다. 즉, 인간이 가지는 취향을 구성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싫어하느냐 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스 요나스가 선보다 악이 더 인식되기 쉽다고 말한 것을 연상시키게 만드는 것이기도 한데, 그도 그럴 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흔히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마주할 때보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마주할 때 그 상황을 더욱더 명확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인 우리가 가지고 잇는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고통의 부재로도 획득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 선호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마주함에도 우리가 그것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면에 우리가 어떤 싫은 대상을 마주함에 있어서 우리는 거의 반드시 그러한 상황을 또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아니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황은 분명 우리에게 피하거나 타개해야 하는 상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에 따라 결국 그러한 부정이나 기피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상황과 사물이 거세된 나머지의 선택지들이 우리의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가능하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한 나의 취향 중에는 한국 예능에 대한 혐오가 포함된다. 그렇다 나는 한국의 TV 방송에서 마주할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들을 혐오한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코디미 프로그램에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선호를 보이던 아이였다. 4가족이 단칸방에 살던 시절 가슴까지 이불을 끌어 덮은 채로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언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일은 제법 그럴듯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한 코미디 프로그램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은 언제나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2.폭력성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그런 프로그램들을 더 이상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것, 특히나 대한민국의 예능이라는 것이 폭력성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폭력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이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진부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볼 수 있는 폭력성은 누군가를 우스꽝스럽게 만듦으로써 파생되는 폭력성이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은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특정 인물을 희화하는 것이다. (물론 최근은 개그의 개발로 다소 개선되었지만) 그것은 그 캐릭터가 가진 덜렁댐이나 못 생김 같은 결함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물론 그것이 항상 일방적인 것은 아니고 어쩌면 상호 교환적으로 그러한 희화가 순환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여전히 폭력적이다. 그저 일방폭행이냐 쌍방폭행이냐의 차이랄까. 그리고 이러한 폭력성에 대한 혐오는 그것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폭력성을 잠재시킨다는 것 따위의 이유라기보다는 ‘그냥 보기 싫다.’라는 측면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 나는 그런 행위가 보기 싫다. 누군가의 모자람이 실존에 대한 고민이나 삶의 운치를 거세당한 채로 군중 앞에 노골적으로 발가벗겨진 채로 만장일치 된 웃음과 오락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나는 보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어릴 적의 나는 왜 그런 생각 없이 그냥 그러한 것들을 선호했던 것일까. 생각하기로서는 그때의 나는 아직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웃음이라는 것이 그러한 폭력성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웃음이라는 것이 우스꽝스러움과 타인의 희화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삶에 각인된 소중한 기억에 대한 고찰과 재구성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나에게는 위와 같은 <취향>이 생겨나게 됐던 것 같다.

어떤가. 내가 하는 이러한 비판이 현실을 외면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무리 부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에는 그러한 폭력성에 엄존하고 예능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닿아있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러한 것을 애써 부정하는 것은 결국 눈 가리고 아웅 이라는 비판, 혹은 개그를 다큐로 받아들이느냐는 조소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누누이 말하듯 무엇인가를 부정하고 마지못해 받아 쥐는 것과, 아무런 혐오도 느끼지 못한 채 그것을 어떤 거부감도 없이 부드러운 목 넘김으로 삼켜버리는 것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취향의 차이이며, <취향>이라는 것이 그 존재의 스펙트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순간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예능 그 자체 보다는 그것을 선호하는 인간을 더욱 혐오하는 경향이 있다. 매체에 대한 취향이 인간에 대한 취향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도 관련된다. 아무리 예능이 강력한 힘으로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그것에 함유된 폭력성을 감지하고 거부할 잠재력이 있다는 믿음은 나로 하여금 누군가를 억압하는 예능을 선호하는 인간을 경계하도록 만들게 하는 것이다.


3.자막

이런 측면에서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편집, 그 중에서도 특히 <자막>에 대한 것이다. 나는 굳이 예능을 찾아보는 인간은 아니고 어쩌다 우연찮게 그리고 덩달아 그것들을 마주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냥저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것을 지켜볼 때가 있는데, 그러다보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측면들에 또 그냥저냥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이내 곧 정신이 번쩍 들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다름 아닌 <자막>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 자막이라는 것에 직면하게 되는 순간 나는 심각한 혐오와 경각심을 느끼며, 역시 이런 것은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적하는 <자막>이라는 것은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자막은 아니다. 그러한 자막은 시청자들이 방송을 이해하는 데 조력하는 것으로써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시청자의 반응을 유도하고 또 그들의 사고방식을 특정한 방향으로 고착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 보였다. 방송 중에 들려오는 방청객의 웃음소리(사실은 녹음되어 삽입된 것이겠지만)도 시청자들의 반응을 유도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맥락이지만 이러한 자막은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의 사고를 유도하려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구체성을 가지며 그 구체성 때문에 그 폐해가 더욱더 심각하고 할 것이다.

그것은 시청자가 화면의 어떤 것이 주목하도록 만들며,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인상을 규정함으로써 그러한 규정 이외의 어떤 인상도 허용하지 않으며, 시청자의 판단에 앞서서 특정의 가치판단을 내림으로써 웃음이나 즐거움에 있어서 다양성을 제거해버리는 효과를 가져 온다는 게 나의 인상이다. 이점에 있어서도 역시 개그를 다큐로 받아들인다느니, 겨우 자막에 대해서 뭐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는 등의 비판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다. 이 말은 인간이 어떤 악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함하는 동시에 행여나 그러한 인간의 가능성이 제한되는 경우에는 실로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리라는 확신 역시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자막을 마주할 때 위험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다. 그러한 자막을 화면에 적어 넣었고, 또 적어 넣어야만 했을 그 누군가와, 그 자막에 생각 없이 웃거나, 또 한편으로는 내심 아파했을 또 다른 누군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4.맺는말

앞서 읽으셨듯이 나는 취향이라는 단어로 이 글을 시작했다. 그것은 결국 이 글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포함할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고, 모든 예능이 그런 것은 아니며, 모든 자막이 그런 것도 아니다. 나 역시 모든 예능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예능들 중에는 그 누군가가 저속하다고 생각할만한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이것은 취향의 문제이고, 존중이라는 미덕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취향이 딛고 서 있는 그 어떤 기준 즉, 폭력성에 대한 혐오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이라는 가치가 제법 일반화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바로 그 인간이라는 존재에 뿌리 내리고 있는 필연성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부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다양한 것들 중에 하나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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