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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철학

우리 개그가 지향했으면 하는 방향(쾌락의 질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by 통합메일 2012.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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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개그가 지향했으면 하는 방향

(쾌락의 질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조혜련’이라는 개그우먼이 있다. 이름만 가지고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오랜 방송 경력을 가진 우리나라 대표 개그맨들 중 한 명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진출한 그녀가 일본의 방송에서 한국의 문화를 비하하고, 나아가 자신의 직업인 개그에 대해서도 '일본 개그를 동경해 왔다''한국 개그는 몸 개그다'1)라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그녀의 언행에 대해서 네티즌들은 거침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게 원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일본에 대해서 자신의 조국을 굴욕적으로 묘사한 그 언행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나는 TV에 나오는 우리나라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다시 그녀를 떠올리게 된다. 이전부터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불쾌함을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했는데 어쩌면 그 감정의 실마리를 그녀의 문제를 점검함으로써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분명 조혜련 씨의 언행은 자신의 조국을 격하시키는 것으로서 동료 시민들의 도덕적 지탄을 받을 만 했다고 생각된다. 양국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특수한 감정의 골을 떠나서,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한국에서 온 연예인’이라는 이미지를 강력하게 어필하며 진출한 그녀는 좀 더 행실에 신경을 썼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분별없는 행동이었다.

나아가 한국개그는 몸 개그이고, 일본 개그는 하이테크 개그라는 이분법도 문제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그 두 가지의 개그는 서로 혼재되어 있다. 오히려 폭력적이며, 여성을 비하하고, 성도덕이 문란하며, 퇴폐적인 개그의 경우에는 일본 쪽이 경우에 따라 더 심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공적 도덕이 제법 엄격한 편이라서 몸 개그라고 하더라도 어지간히 정도를 지키는 편이다. 따라서 몸 개그라는 것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개그를 질적으로 서열화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발언을 통해서 ‘개그에도 질이 있다.’는 명제를 생각해 낼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몸 개그를 기준으로 한 일 양국의 개그를 통째로 서열화 할 수는 없지만 개그라는 것이 있다면 그 개그들에는 분명히 좋은(혹은 옳은) 개그가 있고, 나쁜(혹은 그른) 개그가 있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선 목적론적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면 먼저 개그라는 것의 목적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개그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청자에게 쾌감을 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개그의 목적을 잘 설명하는 것이 있을까? 우선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우리는 ‘몸 개그’와 ‘순전히 말로 하는 개그’를 구분할 수 있다.

‘몸 개그’의 경우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1.차력적인 행위나, 2.우스꽝스러운 분장, 3.고함을 지르는 것 등을 통해서 쾌감을 얻도록 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고, ‘순전히 말로 하는 개그’의 경우에는 1.대담이나, 2.독백 등을 통해서 오직 언어만을 가지고 시청자들의 상상력을 이용하여 쾌감을 얻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물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개그의 경우에는 이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어서 둘 중 어느 한 쪽이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바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면 그 적용률에 따라서, 혼재된 경우에 있어서도 나름의 가치 판단이 가능하리라 예상된다.

이 두 가지의 가치를 구분하는 데 적용할 이론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 공리주의다. 개그의 목적이 어떠한 쾌감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러한 쾌감에도 질적 차이가 있는 바 그 질을 기준으로 더 높은 쾌락과 더 낮은 쾌락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쾌락을 구분하는 구체적 과정이 다소 문제가 되겠는데, 그의 경우에는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쾌락을 다 경험해 본 사람이 선택하는 쾌락이 바로 더 높은 쾌락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몸 개그’와 ‘순전히 말로만 하는 개그’를 모두 본 사람이 선택하는 종류의 개그가 더 수준 높고, 가치 있는 개그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현실과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개그 프로그램을 접하는 사람의 경우에 순전히 ‘몸 개그’만 본다든지, 순전히 ‘말로만 하는 개그’만 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두 가지 종류의 혹은 혼재된 개그를 보면서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어느 한 쪽만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밀의 말대로 두 가지 종류의 쾌락을 다 경험한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더 높은 쾌락을 택했다면 두 종류 중의 한 개그는 사라지지 않았을까?

다만 나의 경우에는 비교적 명백하게 ‘순전히 말로만 하는 개그’를 더 좋아한다. 밀의 이론을 적용해 보자면 나는 ‘말로만 하는 개그’를 더 높은 수준의 쾌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가진 이성과 창의력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쾌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몸 개그’의 경우에는 우리의 감관을 통해서 ‘반사적으로’ 웃음이 튀어나오는 반면, ‘말로 하는 개그’의 경우에는 개그맨의 정보가 우리들 내부로 들어와서 그것이 우리의 이성과 상상력을 통해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더 복합적이고 더 우리에게 적합한 쾌감이 될 수 있으리라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찝찝하다. 과연 이것만으로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은 비단 말로 하는 개그와 몸으로 하는 개그의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번째 문제가 제기되는 데 그것은 ‘자신이나 타인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개그’와 ‘그렇지 않은 개그’다. 아무래도 나는 이것이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다.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그것이 내 이성과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누군가를 우스꽝스럽게 만듦으로써 시청자를 웃기려고 시도하고 있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개그 프로그램을 볼 때 느꼈던 감정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이상한 분장을 하거나, 누군가의 뒤통수를 때리거나, 이로 무를 갈거나, 자신의 못 생긴 외모를 강조하거나,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는 등의 행위로 웃음을 시도하고 또 한편에서 그런 행위에 망설임 없이 웃음을 날려주는 부류의 시청자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감이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쾌감을 위한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그런 현실에서 나는 본능에 가까운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그러한 부류의 개그에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개그에 환호하는 시청자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주장은 앞서 언급한 ‘몸 개그’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될 수 있다. 사실 인간을 수단화하는 개그는 비단 ‘몸 개그’ 뿐만 아니라 ‘말로만 하는 개그’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때에 따라서는 더욱 더 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일본 개그의 특징 중의 하나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늘 심심찮게 비난을 받는 것은 ‘몸 개그’에 집중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아무래도 인간의 존엄성을 좀 더 직접적으로 해치는 것이 몸 개그라는 인상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로 하는 개그의 경우에는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고 오는 효과가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또 가시적으로 결과가 남지 않는다. 하지만 몸으로 하는 개그의 경우에는 그것이 인간의 감각기관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는 시각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전달되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런 개그의 결과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몸 개그를 더욱 더 저질의 개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도덕적 민감성의 결여로 인하여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라면 단순히 다양성의 범주로 관용할 수만은 없는 문제다. 만약 우리 사회가 좀 더 도덕적 민감성이 발달했더라면 우리는 보다 깊은 논의를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2)

사실 개그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은 모두가 행복해 지는 것이냐 아니면 모두를 위해 누군가가 불행해지는 것이냐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개그맨들은 타인을 웃길 수 있다면 자신이 어떤 꼴이 되든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무척이나 무책임한 말이다. 우선적으로 그들은 쾌감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경외시 하고 있다. 누군가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자신이 존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혀 존엄하지 않은 존재가 다른 존재의 존엄을 인정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분별없이 그저 쾌락이라는 목적만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이나 자신의 동료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행위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시청자의 존엄성마저 훼손하고 사회의 도덕적 민감성을 둔감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쾌감을 추구한다는 개그에 있어서도 ‘모두 함께’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로 인하여 개그가 좀 더 어려워지더라도, 혹은 좀 덜 웃겨지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무엇인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끝-


1)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8121216394554060&type=1&outlink=1

2) 물론 이런 인간 존중을 따지는 사람이 상황에 따라서는 더욱 더 비인간적이고 인간에게 잔인하기도 하다는 경험적 반박이 따라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반박이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개그를 지향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어떤 흠결을 남길 여지는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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