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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어머니의 집

by 통합메일 2013.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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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집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내게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에게는 친정, 그러니까 어머니의 집이 있다.

그것은 내 어머니의 집이며,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집이기도 하다.

사실 엄연히 따지면 내 어머니에게는 그저 결혼하기 이전까지 살던 집이고, 지금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어머니의 집일 따름이겠지만, 나는 외갓집에 다녀올 때마다 목격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녀가 분명히 그 집을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하곤 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마는 이것은 ‘재산 분쟁’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시시콜콜한 ‘7080 특유의 향수’에 전적으로 가깝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외가와 친했다. 외할머니는 큰 딸인 내 어머니 밑으로 아들, 딸, 아들을 두셨는데, 삼촌들과 이모는 다들 개성이 상당히 강해서 그들의 인생시기 마다 내게 강한 호불호로 다가왔다. 때로 그들은 내게 엄청나게 반가운 대상이었고, 때로는 무척이나 어려운 대상이기도 했다. 아무튼 어떤 시기든 간에 ‘호’로 다가오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기 때문에 외롭진 않았다. 외할머니도 친손자 급선무주의에서 그리 자유롭진 않은 분이었으나 외손자라도 있는 게 나 중학교 때까지 나 혼자였기 때문에 외손자였음에도 제법 어여쁨을 받아 어릴 적부터 섭섭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외갓집이 참 좋았다. 산골인지라 TV가 안 나와서 심심해서 좀 싫기는 했지만 외가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가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던 것 같다.(물론 몇 번 있긴 했다.) 유치원 때는 엄마 아빠가 너무 바빠 제법 오래 동생과 함께 외갓집에 맡겨진 적도 있었다. 가을이었는지 봄이었는지 모르겠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논에서 보리인지 볏짚인지를 잇고 있었고 어린 나는 논둑인지 짚단인지에 앉아 강아지풀 따위를 손가락에 칭칭 감으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아마도 그 때 할머니가 낫에 손을 베여서 할아버지가 풀을 짓이겨 붙여주던 광경이, 그 피의 색깔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고, 오랜 시간을 지나서도 생생한 그런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괜히 잠깐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본능적 향수 같은 것일까. 아무튼 유년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심심한 나머지 외갓집에 가면 밖에 나가 이런저런 일들을 돕기도 했다. 고추 따는 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한 자루를 따면 5천원.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즐거움, 머리를 써서 일하는 즐거움을 알았던 것 같다. 할 때는 힘들어도 나중엔 즐거웠다. 대학에 간 뒤에는 뭐 이것저것 많이 했다. 고추밭 만들기, 고추 심기, 모내기, 또 무슨 밭 만들기, 깨 심기, 깨 베기, 추수의 과정을 거치고, 콩타작으로 피날레를 맞이하며, 한겨울에는 다 같이 모여 김장을 했다. 즐거웠다. 늘어나는 자손들에 한 해 한 해가 지루할 날이 없었다. 돌아보면 더욱. 내 처지가 떳떳했더라면 좀 더 나았으리라.

다만 외가에 갈 때마다 내게는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 괜히 심술이 나서 여기저기 화풀이를 하게 만드는 것. ‘뿔떼’라고 했다. 나는 종종 ‘뿔떼’를 부렸다. 그리고 또 종종 참다못한 어머니 손에 붙들려 들어가 매를 맞았다. 번번이 혼이 나면서도 나는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했다. 심술을 부리면서도 나는 도대체 내가 왜 기분이 나쁜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심심해서 그렇겠거니 하고 치부했던 모양이다. 그 원인을 알게 된 것은 사춘기의 고개를 넘어서 터벅터벅 산비탈을 걸어 내려오던 어느 날이 아니었을까 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노골적으로 잘 보여서 왜 그때에서야 그것을 깨달았을까 의아할 정도인데 하여간 분명하게 확신하게 된 것은 그때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아직 어렸을 때는 그렇게 노골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어머니였다. 외갓집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내 어머니라기보다는 외갓집의 딸로 돌아가곤 했다. 어머니는 내 외할머니의 집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머니 당신의 집으로 돌아온 사람인 것 같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이나 간섭이 심하다고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때로 손사래를 치며 말하듯 나 역시 만만치 않다. 어릴 적에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그런 나의 눈으로 외갓집에 갈 때마다 처녀 시절로, 천상 영락없는 외할머니의 딸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볼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괜한 자기연민은 질색이지만 그 ‘뿔떼’의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 얘기하자면, 그것은 ‘잠시 고아가 되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한다. 괜한 심술은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치자. 어머니의 눈에는 그런 내가 ‘잠시나마 과거로 돌아가는 데에 있어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한다. 여하튼 외갓집에서 나와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좀처럼 화목하기가 힘들었다.

주말을 이용해 어머니는 혼자 외갓집에 다녀오셨다. 나는 가지 않았다. 가서 삼촌들 일이든 엄마 일이든 도우면 좋겠지만, 여기서도 할 일이 있어 가지 않았다. 더불어, 외갓집에 가서 번번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리는 어머니를 보는 일이 아직도 내겐 좀 벅찬 일이다. 그만큼 나는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소유욕이 여전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냥 혼자 가서 삼촌이나 이모부와 일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머니와 함께 가서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하면 화가 난다. 그에 대하여 내가 아무런 이성적 제어를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 제어가 무색해질 때가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어머니의 일머리가 탐탁찮을 뿐이고, 나이 든 몸으로 힘겹게 저 멀리 걸어가는 추억을 쫓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일이 더불어 힘겨울 따름이다. 그래서 그냥 ‘묵묵’하고자 하는 게 요즘의 근 일이년이다.

언젠가는 그렇게 어린 시절로 늙어가는 어머니를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싶다. 올 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겠다.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괴롭고, 오면 오는 대로 서글퍼 또 괜히 쓸데없는 효심이 복받쳐 오를 것이 뻔하다. 어느 쪽이 더 현명한 것일까?

아무튼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 같고 문제는 지금이다. 나는 어머니의 집이 언제까지고 영원히 그곳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아마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은 어머니일 것이다. 그 집은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까지만 함께 살아있을 것이다.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지나간 날보다는 짧을 것이기에 그것은 내 어머니에게 한없이 소중해져가는 존재일 것이다. 마치 내게 있어 나의 어머니가 한없이 소중해져가는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그 소중함을 위해 내가 할 일은 눈을 감고 잠시 입을 다무는 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외갓집 마당, 시멘트 속으로 잠든 흙 위로

어머니의 집 이곳저곳에서 어린 어머니가 뛰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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