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상

간사비열적인간으로서의 김정환론

by 통합메일 2013. 10. 21.
반응형

간사비열적인간으로서의 김정환론


이렇게 말하면 참 무책임한 말인 줄은 알지만, 태어나 보니 나는 간사한 인간이었다. 어머니의 사교성과 아버지의 꼼꼼함이 융합된 결과일까. 나는 사람을 관찰해 그 감정변화를 읽어내길 즐긴다. ‘섬세함’이라고 좋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애써 그럴 필요를 느끼기에 앞서 그것은 엄연히 간사함이다. 빅브라더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관심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면 섬세함이라 불러도 무방하겠으나 생각하기로 나는 그렇지 않다. 이리저리 재고, 계산하며, 예측하고, 조종하고자 한다. 물론 이 능력은 상당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데 어린시절에는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니까 관찰할 수 있는 표본의 범위가 무척 좁은 나머지 고려해야 할 변수들을 전~혀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 그래도 어쩌다 운이 좋게 때려 맞추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험들이 나로 하여금 사람들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다는 모종의 우월감을 갖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 우월감은 머지않아 어김없이 붕괴되기 마련이었지만, 그와 같은 경험의 연쇄는 좀처럼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보니 생이란 것이 그런 관찰과 도박과 실패의 끝없는 반복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동안 그에 대한 회의나 각성이 없던 것은 아니다. 세계 내 존재로서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하기 시작한 탈사춘기에 즈음하여서부터는 매번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제법 자력갱생의 다짐을 해보기도 했으나, 아무래도 이 빅브라더가 발산하는 매력이라는 것은 그런 다짐이 무색하리만큼 어마어마했던가 보다.

내가 간사한 인간으로 빛을 발하는 과정은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내 편 만들기’다. 사실 그것은 계산이라고 하기엔 좀 이성적 추론의 과정 같은 것이 매우 결핍되어 있다. 거기에 소요되는 노동은 이성이 아닌 감정의 그 무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것은 차라리 행동주의의 조건반사 실험을 닮았다. 인간 A를 관찰하고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그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주면 그가 어떤 반응을 하리라는 직관적 예상에 근거하여 그에게 행위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하나는 그 인간 A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일 것이라는 점과, 내가 유도하는 그의 반응이 그로 하여금 나에게 호의를 갖도록 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거창한가? 물론 전혀 거창할 것이 없다. 이 세상에서 밥 먹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인간관계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가지고 지향하고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는 ‘경계 짓기’다. 나의 진가는 여기에서 빛난다. 하나 둘 내 편을 만들다 보면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그에 대응하는 ‘적’이라는 존재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다 같이 친구지 내 편이 어디 있고, 적이 어디 있냐는 사람들이 세상에 적잖이 존재함을 나는 안다. 하지만 나의 눈에 그들은 지구상에 제한되어 있는 재화를 부정하든,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하든,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든 간에 분명 어디에선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상적인 국가나 세계관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로서의 인간사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세계에서도 사람들은 내 편, 쟤 편 같은 구분 없이 사이좋게 잘 살아간다. 하지만 아직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애써 무엇인가를 외면하고 부정함으로써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관점이다.

때문에 나는 ‘경계 짓기’에 힘쓴다. 우선 내 마음 속에서 내 편과 적을 조금씩 조금씩 분명히 만들고, 실제적인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을 확인해 나간다. 그리고 나아가 내 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 마음 속의 그러한 그림을 전파시킨다. 사실 현실주의적 관계이론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내 마음 속에 그려놓은 조직도를 외부세계에 경쟁적으로 투영하는 것 말이다. 물론 그 형식은 평화로울 수도 있고, 매우 호전적일 수도 있다. 다만 어떤 경우이든 간에 그 수면 밑에 깔려있는 본질은 대동소이하리라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관찰하기’다. 사실 이것은 모든 단계들에 동반하여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나는 이 과정을 매우 즐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을 관찰하고 그의 감정변화를 알아채는 일을 나는 좋아하고 어쩌면 제법 잘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사람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순간이, 심지어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상태에서 순식간에 정반대의 감정으로 돌아서버리는 순간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위와 같은 관찰의 작업은 오랜 시간동안 함께 생활함으로써 한없이 익숙해질수록 용이하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패턴 혹은 반응양식이 어느 정도 내 스스로에 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네 번째 단계는 ‘조작하기’다. 내가 망가지고,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간사하며 비열해지는 단계다. 위와 같은 관찰과 경계 짓기의 과정을 통하면 제법 쉽게 조직의 핵심부로 접근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개성이 다양한 인간들마다 무난하게 요구되는 반응과 자극을 관찰하고 그것을 제공해줘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 과정인 정말 힘들다. 거기에 따르는 보상은 무엇인가? 어느 수준까지는 인간들을 관찰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만으로도 보상이 된다. 하지만 그 어느 수준을 넘어서게 돼버리면 그것으로는 더 이상 보상이 되질 않는다. 인간들의 반응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식상하고 지루하게 느껴지고, 그에 따라 인간들의 마치 하나의 정물처럼 보이게 됨으로써 그 이상을 요구하게 된다. 무엇일까? 아동심리학자 피아제의 이론 중 ‘물활론’이라는 것 혹은 ‘만물유정론’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어느 시기까지 아동은 세상의 다양한 사물들이 모두 생명과 감정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동의 마음속에서 사물은 순식간에 생명과 감정을 잃고 그야말로 하찮은 사물이 되어버린다. 그때부터 그것은 그저 조작의 대상, 즉 장난감에 불과하게 된다. 얼마든지 자신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그러니까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이미 이렇게 경계를 나누고 그 핵심에 들어앉은 이상 설사 그것이 전적으로 나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기에서 손 털고 일어서기에는 너무나도 아쉽다. 결국 파멸의 엔터키를 누르게 마련이다. ‘파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그 이후의 결과가 거의 필연적으로 지금까지의 공로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필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그와 같은 조직을 ‘조작’하기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내가 획득할 수 있는 정보와 권위과 무척이나 ‘제한적’이었기 때문이고, 애당초 그런 조작을 시도하게 만든 비인간적 관점의 획득 자체가 무모한 오류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런 점을 적으면서 다시 한 번 위와 같은 실수를 지양하길 다짐하는 바이다.


Q.가장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족에서도 실패했는가?

Q.나는 내 어머니가 내 아버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순간을 목격했는가?




반응형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짝 여성 출연자 사망에 따른 폐지에 대한 단상<유서 전문>  (0) 2014.03.08
가족은 한 집에 있다.  (0) 2013.12.26
어머니의 집  (0) 2013.10.21
어머니의 비전  (0) 2013.09.23
콜버그의 메타성  (0) 2013.09.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