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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은교 영화감상문(사랑의 기술, 사랑할 권리에 대하여)

by 통합메일 201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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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영화감상문

1.소개

2.줄거리

3.야함의 상업성

4.문학

5.사랑할 권리-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관련하여


1.소개

이 영화는 박범신 작가의 장편소설 『은교』를 원작으로 정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정지우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모던보이, 이끼 등이 있다. 주연배우는 박해일, 김무열, 김고은이 등장하며 결과적으로 이 세 사람이 형성하는 삼각관계가 이야기의 주된 모티브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영화 <은교>의 줄거리와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요소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주는 교훈과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랑에 대한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보려 한다.


2.줄거리

이적요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로서 국민시인으로 추앙받을 정도의 권위를 가졌다. 작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명예를 가진 그는 산 속에 있는 자신의 집에 기거하며 노년의 햇살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한때는 젊음으로 가득했던 그의 육체는 이제 많은 것이 빠져나가 쭈글쭈글해졌다. 그런 그의 곁에는 항상 서지우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달라붙어 있다. 그는 이적요의 대학교수 시절 제자로서, 주목 받는 젊은 신인 작가였다. 지나칠 정도로 이적요에게 집착하는 서지우를 보며 세상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으나 그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심을 다해 스승을 모신다.

그런 그들 앞에 은교가 나타났다. 이적요와 서지우가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거짓말처럼 정원의 안락의자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왜 여기 있다는 다그침에 은교는 “이런 의자에 앉아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하고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첫 만남 이후 몇 번인가 그녀가 다시 이적요의 집에 놀러오게 되면서 은교는 이적요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녀의 집은 매우 가난했고, 마침 서지우는 자신의 집필활동 때문에 이적요의 시중을 드는 게 귀찮아질 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잠시 서지우라는 인물이 이야기의 무대에서 사라진 잠깐 동안 이적요는 은교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폭우가 내리던 어느 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찾아온 은교가 재워달라는 부탁을 해서 재워줬는데, 어느새 그녀가 이적요의 이불 속으로 들어와 있고, 다음날 아침 갑작스럽게 이적요의 집을 방문한 서지우가 그 광경을 목격하는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서지우는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적요는 싱그러운 은교의 육체 앞에서 자신이 과거의 젊은 몸을 강하게 아쉬워한다는 것을 자각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나이를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그는 차마 그런 욕망들을 현실로 가져오지는 못하고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쪽을 택했고, 그 결과 쓰여진 소설이 극중에서의 『은교』다.

만일 여기에서 이야기가 멈춘다면 사라지지 않은 자신의 욕망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훈훈한 미담으로 끝날 수 있었겠지만 영화는 그런 결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서지우는 우연히 이적요의 서재에서 감춰진 소설 『은교』를 발견했다. 그 제목만으로도 그 소설은 서지우의 욕망과 예감을 충족시키기에, 그리하여 그를 유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몰래 그 소설을 훔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사실 그는 작가적 역량이 부족한 인간이었다. 그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작품 역시도 사실은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그에게 보상으로 내린 이적요의 심심풀이 작품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 사랑을 집중해야 할 스승이 새로 나타난 은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모종의 위기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적요는 몹시 분노했다. 자신의 작품이 도둑질 당했고, 자신의 마음이 만 천하에 까발려지게 됐다. 은교에 대한 마음을 담은 자신의 소설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상황에서 어쩌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도둑맞은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이적요는 서지우를 파문하고 은교에 대해서도 문을 닫아버린다. 배신과 상처와 두려움 앞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모든 것을 등지는 것이었다.

처음 은교를 만났던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 이적요의 생일이 되었을 때 그의 앞에는 다시 은교와 서지우가 나타났고 그는 마지못해 다시 두 사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날 밤 이적요는 두 사람이 자신의 서재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상처받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두 사람의 사이를 확인한 그는 차의 부품을 빼서 서지우를 사고로 죽게 만든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사실을 은교에게 알려서 그녀 역시도 살인자인 자신을 완전히 떠나가도록 만든다.

이제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된 은교는 과거의 『은교』를 다시 읽고는 그 소설을 쓴 것이 서지우가 아님을, 자신을 진정 그토록 사랑하고 아름답게 만든 이가 다름 아닌 이적요임을 깨닫고는 그의 집을 찾아가 한 없이 웅크리고 쪼그라든 그의 등에 대고 말한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3.야함의 상업성

나는 원작『은교』를 읽지 않았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볼 당시에는 원작자가 박범신이 아니라 성석제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을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다만 박범신이든 성석제든 간에 한국 현대 순수문학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나를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와 더불어 내가 상영관에 들어가기 전에 알고 있었던 의미심장한 정보는 이 영화가 ‘야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대체 얼마나 야한지 많은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랬다. 영화가 시작되고, 이야기의 배경에 관객들이 적응을 하기가 무섭게 은교가 등장했을 때부터 이 영화는 과연 열심히 야했다. 이 영화의 야함을 논할 때 우선 정사씬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딱 두 번이다. 그러니까 초반에 젊은 시절의 이적요와 은교, 그리고 후반부에 서지우와 은교. 야하다는 입소문으로 유명해지는 영화들과 비교해볼 때 그리 많은 횟수를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생각되는데 문제는 양이 아니고 질이다. 성기와 음모가 노출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질적으로 차별화된 야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이 바로 이 영화에 따라붙는 ‘야하다’는 꼬리표의 이유가 아닐까 한다. (손을 이용한 섹스도 한 몫을 단단히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작 그런 장면들은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일본 AV가 범람하는 시대에 그 정도의 노출이 관객에게 던질 수 있는 효과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차라리 그 장면들은 이야기의 흐름에 매우 필수적이고 효과적인 장치로 여겨질 따름이었다.

오히려 내가 불편했다고 회상하는 것은 이 영화가 틈만 나면 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은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원작에서 그려지는 은교의 묘사에 충실하고자 그렇게 배우의 몸을 위 아래로 훑은 것이라 이해한다고 쳐도 이후로 계속 정신없이 여배우의 다리나 목덜미나 가슴을 노골적으로 쓰다듬는 카메라 워크에서 나는 이 영화에 묻어있는 상업주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영화는 상업 영화이기 때문에 그 점이 이 영화가 가지는 치명적인 결격 사유 같은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업주의의 요소들은 감상 내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원작의 의도가 훼손될까봐, 오랜만에 만난 괜찮은 영화에 실망하게 될까봐, 아니 혹 어쩌면 극중 이적요에게 충실하게 감정이입 한 나머지 ‘나의 영원한 처녀’ 은교가 더러워질까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4.문학

이 영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하나는 이 영화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문학이라는 것이다. 줄거리에서 언급했듯이 등장인물인 이적요와 서지우는 모두 작가이며, 극중에서 『은교』라는 작품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이상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인 동시에, 은교를 사랑하는 이적요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이적요가 서지우를 파문하고, 은교가 서지우를 좋아하게 되고, 뒤늦게 은교가 이적요의 마음을 알게 되는 그 모든 사건에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나아가 극중에서의 문학은 이적요와 은교가 나이를 초월한 교감을 경험하게 해주는 매개체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나친 나이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의 감정 사이에는 사랑을 이룰만한 교차의 지점을 찾을 수가 없는데 부분적으로나마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문학계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과거의 작가들과는 달리 대중성을 겸비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작가들, 대필된 작품으로 주목 받는 신인 작가가 되는 젊은이, 그리고 도둑질한 작품이 문학계 최고의 영예인 이상 문학상을 수상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면서 과연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나는 무척이나 궁금하다.


5.사랑할 권리-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관련하여

영화 은교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 아마 대다수의 관객이 모두 다 들었을 그 질문은 바로 “사랑은 나이를 초월하는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단 이 영화가 하려는 대답은 “초월한다.” 아니면 최소한 “초월해야 하지 않는가?”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유는 극중에서 모종의 선악 구도가 만들어져 있고, 늙음으로 대표되는 이적요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그의 심리 상태를 관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가지고 있는 형식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모종의 메시지를 획득하고 있다는 말이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흔히 떠도는 말로 우리는 ‘사랑은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다.’는 말을 알고 있고, 은연중에 스스로 그 말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접하게 되는, 사랑에 대한 묘사와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인류 최고의 가치니까, 흔히 말하는 세계평화와도 비슷한 색깔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사랑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듯이 많은 현대인들이 사랑을 능동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수동의 능력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고민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닐까? 영화는 우리의 눈앞에 그 문제를 들이대고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하고 있다. 정말로 저 질문에 동의하느냐고, 정말 사랑이 나이를 초월할 수 있느냐고.

일단 위의 문제는 지금 이 글에서 대답할 수 없음을 나는 고백하려 한다. 그것은 단순히 한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나아가 한 사회와 전 세계에 사는 인류가 자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그나마 간신히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닐까 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이와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의식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할 권리’다. 앞서 언급한 문제와 이 문제의 구분을 명확히 해보자면 전자는 나이를 초월한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랑할 권리라는 것이 나이에 상관없이 향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는지 혹은 동의해야만 하는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이는 극중 서지우의 반응과 이 영화에 대한 뭇 대중의 망설임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서지우의 도작을 눈치 챈 이적요는 서지우를 파문한다. 그러자 서지우는 자신의 정성을 몰라주는 이적요를 원망하며 그에게 “선생님은 노인이라고요!”라는 독설을 날린다. 이 말에 이적요는 극도로 분노한다. 한마디로 정곡을 찔린 것이다. 이와 관련한 대중의 반응 역시 흥미로운데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영화 후기 역시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대중들의 질문이 조금 잘못됐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현대인들이 사랑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사랑을 ‘내가 행하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미모나 능력에 상응해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나 관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초반부에 나오는 그의 진단이다.

이를 다시 대중의 반응에 대입하면, ‘늙은이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가? “와 ’늙은이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해도 되는가? ‘의 문제에 대한 관념이 명확히 구분되어 고찰되지 않고 있는 동시에 두 관념이 혼재되어 있거나 아니면 전자에 기형적으로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바, 사랑은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기에‘ 대부분의 경우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천착한 나머지 이 영화를 바라봄에 있어서도 은연중에 그런 사고방식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 노출되어 있으며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문제시 되어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나는 당연히 그것은 ‘늙은이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해도 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극중에서 이적요가 경험하는 갈등의 원인은 은교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은교를 사랑하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데 실패해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간절히 원하며 그 결과에 따라 희비를 경험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을 얻어 기뻐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얻지 못해 슬퍼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그 이전의 문제다. 누군가의 사랑을 기대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있는지 의심스러워질 때, 진정한 사랑의 시련은 그때 다가온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질문을 명확히 분석해서 볼 때 이 영화의 메시지가 가진 깊은 맛을 제대로 감미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이적요는 은교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가? 그의 나이가 그것을 빼앗아 가지는 않았는가? 반대로 은교는 이적요를 사랑해도 되는가? 우리는 우선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이적요가 은교의 사랑을, 은교가 이적요의 사랑을 얻어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인지는 그 다음에 두 사람의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극중 이적요가 했던 의미심장한 말이 생각난다. 파문당한 제자 서지우의 이상 문학상 시상식에서였고, “선생님은 노인이라고요!”라고 했던 서지우에게 하는 대답이었으며, 세상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이 대사는 곧 세상을 향한 이적요의 선전포고인 동시에 이 영화의 문제의식을 명확하게 해주는 문장이라고 생각된다.

자,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영화만 보자면 아무리 특수 분장을 했어도 배우 박해일이 연기한 이적요는 제법 ‘잘 늙은’ 노인이다. 그에게는 사회적 지위, 명예, 남부럽지 않은 경제력, 제자들, 인맥, 무엇보다 문학적 재능과 그로인한 운치가 있다. 어쩌면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은교와 이적요가 예쁜 커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나머지 그들의 시련을 그저 로맨틱한 애틋함으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스크린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권선징악이 실현되려면 악의 축인 서지우는 깨끗하게 죽고, 은교와 이적교가 인연을 맺는 것이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이는 탁월한 외모의 배우들과 영화가 설정해 놓은 선악구도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몇 년 전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중년기를 보내고 홀로된 두 노인의 사랑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였다. 당시에는 이 영화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접근이 난무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름답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의견도 많았고, 이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 프로그램에서도 열린 평가를 내놓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그 이유가 이 영화가 가진 ‘사실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젊은 배우를 분장시킨 것이 아니라 실제 노년 배우를 캐스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극중의 노인들은 돈도 없었고, 사회적 지위도 없었다. 때문에 속세의 시각으로 볼 때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그것이 영화 <은교>와의 차이점이다. 이 사례만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사회에서 노인들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17세 여고생은커녕 동갑내기 할머니를 사랑할 권리에도 인색한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닐까? 언젠가는 우리처럼 젊음으로 가득 찼을 그들에게 우리는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갈 것을, 주연에서 조연이 되어주기를, 조연에서 단역이 되어주기를, 그리하여 누군가를 사랑할 권리도 알아서 포기해 주기를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철저히 기대하고 강요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 이제 어떤가? 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의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금은 힘겹게 ‘그렇다.’고, 늙어도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은, 권리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긍정해 본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눈을 돌린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른부터 생각해 봤다. 역시 예상대로 그 긍정이 쉽지는 않다. 편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으며, 친숙하지 않아서 낯설다. 그들의 사랑을 긍정한 나의 선택을 선뜻 긍정하기가 힘이 든다. 하지만 나는 그 선택을 번복하진 않을 것이다. 편안함과 친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낯설고 어려운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선물한 고정관념의 족쇄에서 자유로워지는 철학의 길이며, 인간의 길임을 믿기에,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내가 느낀 그 느낌, 은교를 보면서 떠올린 어떤 향기가 내 인생에 존재하는 사랑의 흔적임을 믿기에, 우리 모두 함께 사랑하며,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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