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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23

[시쓰기]별명을 짓는 저녁 김정환 고양이를 만나는 것은 역시저녁이다 별명을 지어달라고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뭐가 좋을까, 라고내가 운을 떼니 그건 정답이 아니에요, 라고첫 실연을 당한 이처럼 돌아서 버렸다 아니 아니 왜 토라지는 거니, 라고달래보려 했지만 고양이는 그만깊숙한 골목길이 되어버렸다 저만치에서 가로등과이만치에서 내가 마주하고 빛나는 것은 별명 없는골목과 추억 뿐 오늘도 나는 저녁을 품고별명을 짓는다 2013. 11. 28.
[시쓰기]선물 김정환 결국 마음은 세 시로 갔다. 아쉽지만 몸은 두 시에 두고 올 수 밖에. 약속은 일곱 시다. 아니 약속도 아니다. 감동을 위해 자세한 약속은 생략된다. 겨우 몸이 세 시에 도착했을 때 마음은 열한 시를 넘어갔다. 껍질이 벗겨지듯 잔인하게 분리됐다. 아마도 당신은 내 몸과 마음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겠지. 약속장소로 가는 차 안에서 몸은 마음을 부른다. 빈몸뚱이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나 마음은 이미 내일로 달아나 제멋대로 한 달 뒤, 몇 년 뒤를 읽어나가는 중이다. 애타게 불러도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곳에 눌러앉겠다는 전보를 보내오기도 했다 낡은 카페의 평일도 들어가 팔짱을 끼고 창가에 앉았다. 잠이 들 즈음 마침내 당신이 나타났다. 오는 길에 샀다며 노을빛 물든 내 몸.. 2013. 11. 28.
[시쓰기]뽀득뽀득 월요일 김정환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겸손하고,아프지 않은 날에도금욕해야 할텐데 지각한 벚꽃처럼반가운 것이세상에 또 있을까 죄송하지만담배를 피우는 심정으로시를 읽고 베낀다.내 안에 거하다무엇도 남기지 말고 떠나시라고 엄마가 사준 총명탕은 졸음만 옹알대서몽롱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나는오늘도 취하셨을 당신을뽀득뽀득 문지른다. 내일은 꼭 산책을 해야지이내 곧 뿌예지지만. 2013. 11. 28.
[시쓰기]무대 위의 저녁 SE 김정환 태양을 거세당한 극장나는 무대 위에 뿌리 내린 한 그루 저녁이 되었다.서로의 사타구니를 쓰다듬는 관객들 앞에서부릅뜬 조명에 의해 곱게 박제되어 있는 것.방백도 독백도 모든 대사가 다 끝났는데일렁이는 이곳을 내려갈 수가 없다.누군가는 나를 봐주리라는 생각인가.저기 극장을 나서는 연인의 권태 정도는나를 주인공으로 생각해 줄 것인가.가지를 구부려 밑동의 여명을 잘라내고 싶지만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오직 무위(無爲) 뿐이니저 태양 같은 걸 직시하여 내 눈을 태우리찢어진 시간의 틈으로 눈부신 저녁이 흘러들어왔고벙어리 별처럼 나뭇잎 한 장이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201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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