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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30

[시쓰기]무덤짓기 김정환 어느덧 우리의 시절을 긍정하고 위로해주는 말들이 범람하는, 말들이라도 범람하는 시절이 도래했습니다 한 번 구경해 본 적도 없는 인쇄소에서 태어났을 그 말들을 듣고 있자니, 읽고 있자니 한 없이 달콤하여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잠이 밀려옵니다 이 추운 도서관에서 하늘에 떠있는 에어컨 구멍을 꺼칠꺼칠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결국 미소 짓는 생을 포기하려던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새치기 하듯, 봉분을 쌓듯 책상 위에 팔을 포개고 그 틈에 얼굴을 묻습니다 몇 번이나 죽어본 적 있는 자의 능숙한, 현란한 동작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립니다 잠을 깨기 위해 일어섭니다 GPS로 위도와 경도를 계산하듯 내 나이와 D-day를 가늠하며 서가를 서성입니다 그리고 역시 책 냄새에, 그 촘촘한 향기에 배가.. 2013. 11. 27.
[시쓰기]걸어 다니는 나무 김정환 유령처럼 캠퍼스를 부유하던 나는 문득 아마존의 밀림에 서식한다는 걸어 다니는 나무를 떠올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일 년에 몇 미터씩 이동한다는 나무였다 그것은 다리가 아파서였는지도, 아니면 한 낮의 나른함이 지나치게 무거워서였는지도 모른다 불규칙하게 변해가는 인생의 동사들을 외워가면서, 내 마음 속에 한 번도 존재해 본 적 없는 규칙성을 투박한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나는 고개를 돌려 아무도 모르게 그 나무를 찾아보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어쩌면 그 나무가 내 근처까지 오지는 않았을까 뿌리를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자리를 부지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그 나무는 지각생의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모두가 사라져버린 등굣길에서, 노인들이 자신의 인생을 분갈이 하는 아파트 화단에서 그 나무를 만나게 되.. 2013. 11. 27.
[시쓰기]여기는 잔잔하다 2 김정환 유리와 칼이 날카로운 이유는 차가운 소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뜨거움에 시달리던 이들은 고향에 돌아온 부상병처럼 입 다문 소리를 냈다가느다란 불빛 새어나오던 부엌에서 아버지가 내려놓는 소주잔 소리신경질을 내고는 복숭아를 깎으려고 동생이 집어든 과도 소리마음이 아픈 것은 오직 그 때문이다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에서 마음은 늘 바다를 꿈꿨다모든 것을 집어삼키고야 말겠다.물속에 누워 눈부신 멍울들의 출렁임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잠이 왔다이따금 낯익은 소주잔이나 과도가 나를 지나 심해의 바닥으로 침전해 갔다마음은 어떤 소리로 만들어졌을까그 온도를 느끼기엔 나는 너무 먼 곳으로 와버렸다모든 것이 가라앉는 세상그 수면의 계단 밑에서 나는 부유한다잔잔하고잔잔하게 2013. 11. 27.
[시쓰기]파리의 해탈 김정환 도서관 열람실에서 내가 손사래 쳐서 날려 보내고, 그녀가 다시 스매시해서 내 콧잔등에 영면하게 된 이 파리는 전생에 큐피드나 뭐 그런 존재였을까 그 큐피드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파리로 환생했으며 얼마나 더 선업을 쌓아야 다시 신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그녀는?옷깃이 스치는 것은 몇 만 번의 인연이라는데 파리를 주고받은 인연은 대체 무슨 인연을 핑퐁 거리며 살아온 것일까 놀라운 속도로 날아가는 내 시선을 피해 황급히 은폐, 엄폐하는 그녀는 마치 죽은 듯 조용하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파리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제 날개에 묻은 내 콧잔등의 개기름을 정성스럽게 닦아내고 있었다 아 해탈이여 열반이여 그 눈부신 후광이여 20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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