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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30

[시쓰기]밭 만드는 날 김정환봄에는 고추밭을 만든다끊어질 듯 이어진 줄을 할머니가 걸어가면나는 그 자국에 발맞추어 비료를 뿌린다성겁게 혹은 촘촘하게 그렇게 땅은 기름지게널뛰는 포말을 보고 있노라면시선을 타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도 뿌려진다지워지지 않는 것들, 사실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것들추위도 더위도 세대의 보폭 밑으로 스며들어 지하수가 된다나도 이젠 제법 하는구나 싶어 하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목적을 잃고 산개하는 질소와 인산과 고토와 칼슘할머니의 청춘 즈음에 우두커니 서서 오랜만에 고개를 든다어느새 그곳에는 하늘이 있다. 끝나지 않은 세상이 있다그래서 나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뿌려야 할 비료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 까닭이다 2013. 11. 28.
[시쓰기]별명을 짓는 저녁 김정환 고양이를 만나는 것은 역시저녁이다 별명을 지어달라고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뭐가 좋을까, 라고내가 운을 떼니 그건 정답이 아니에요, 라고첫 실연을 당한 이처럼 돌아서 버렸다 아니 아니 왜 토라지는 거니, 라고달래보려 했지만 고양이는 그만깊숙한 골목길이 되어버렸다 저만치에서 가로등과이만치에서 내가 마주하고 빛나는 것은 별명 없는골목과 추억 뿐 오늘도 나는 저녁을 품고별명을 짓는다 2013. 11. 28.
[시쓰기]항이루호르몬 김정환 취한다.초등학교 때는 친했던 이들과십년 만에 만나 벌이는 시사토론나는 오 분에 한 번씩 오줌이 마려웠다.소변기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1급수처럼 맑은 오줌줄기를 바라봤다.“이게 다 항이뇨호르몬이 안 나와서 그래.”13개의 과목 중 오직 생물만 좋아하던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그래 알콜이 항이뇨호르몬 꼭지를 잠가 버렸구나.근데 가끔은 항이루호르몬 꼭지도 잠그는 모양이다.이건 아마 내과겠지.아니 어쩌면 비뇨기과인가.아무튼 어디든 이렇게 말하지 않겠냐.“가끔은 눈물을 배출해 주시는 것도 건강상 나쁘지 않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내 그럼 안심해도 되겠군요.고백컨대 나는 가끔 술에 취해오랫동안 참고 있던오줌 같이 맑은 눈물을 질질 싸곤 한다. 2013. 11. 27.
[시쓰기]형상기억시간(形象記憶時間 김정환 이상하게도 적어두었던 이상한 시들을 파일로 만드는 이상한 짓으로 이상한 기분을 해소해보려는 이상한 시도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무런 성과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는 거인이 되지는 못 하더라도 내 썩은 몸뚱이의 지방 한 조각이 깨어져 나가는 소리 정도는 제법 명쾌하게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던 젬병아리 포부는 총총총거리며 나의 등 어딘가를 찔러대는 만성적인 질병에 의해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듯이 “엄마”하면서 붕괴되었다. 이따금씩은 저 멀리 몇 만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빨래 건조대나, 몇 만 광년 정도가 걸릴 것 같은 냉장고에 드리운 시간의 이름을 중얼거림으로써 나의 목소리를 확인한다. 눈금 하나 없는 시간을 정확히 12등분하고 24등분하는 낮과 밤이 행여나 나의 성대마저 도려내.. 20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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