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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30

[시쓰기]선물 김정환 결국 마음은 세 시로 갔다. 아쉽지만 몸은 두 시에 두고 올 수 밖에. 약속은 일곱 시다. 아니 약속도 아니다. 감동을 위해 자세한 약속은 생략된다. 겨우 몸이 세 시에 도착했을 때 마음은 열한 시를 넘어갔다. 껍질이 벗겨지듯 잔인하게 분리됐다. 아마도 당신은 내 몸과 마음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겠지. 약속장소로 가는 차 안에서 몸은 마음을 부른다. 빈몸뚱이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나 마음은 이미 내일로 달아나 제멋대로 한 달 뒤, 몇 년 뒤를 읽어나가는 중이다. 애타게 불러도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곳에 눌러앉겠다는 전보를 보내오기도 했다 낡은 카페의 평일도 들어가 팔짱을 끼고 창가에 앉았다. 잠이 들 즈음 마침내 당신이 나타났다. 오는 길에 샀다며 노을빛 물든 내 몸.. 2013. 11. 28.
[시쓰기]계란 김정환 처음 보거나, 참으로 오랜만에 보거나혹은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은몽달귀신처럼,앙상한 목 위에커다란 찐 계란을 얹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참 쓸데없이 많은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기도 한데또 그것은 참으로 많은 찐 계란들 위에감동과 감정을 그려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부활절을 싫어하던 어린이는계란에 무언갈 그리는 데에는여전히 영 서툰 어른이 되었다. 매끈한 계란을 앞에 두고쩔쩔매고 있으면어린이에게는 놀림과 꾸지람이,어른에게는 사회적 불이익과 빠따가비교적 친절하게 수여되었다. 사실은 못 그린다기 보다는많이 망설이는 것이다.한 번 그려버린 이목구비는결코 다시 그릴 수가 없으니까. 감동이고 감정이고억지로 무심한 척 벗겨내서는한 입에 콱깨물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러면곧너무나목.. 2013. 11. 28.
[시쓰기]발톱 김정환 깎아야지 하고서는 차일피일아무래도 발톱은 손톱보다는 멀다손톱깎이를 쥘 수 없어 서로에게 유세도 못 부리는 발톱은작은 빙하 몇 개가 더 녹고 나서야 손톱의 세례를 받았다 깎는 건지 분지르는 건지쇠를 닮은 꼬랑내가 스멀스멀하얗게 앉은 때가 문득 나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 근처에 노략질 나온 불개미 몇 마리한 놈이 자기 몸뚱이만한 내 발톱을 번쩍 물어올렸다저게 엄지 발톱이었나 새끼 발톱이었나생각하는 사이 벌써 몇 발자국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중간엔 친구도 만났다좋은걸 구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가발톱은 생전 처음 부러운 시선으로 올려다봐졌다 그나저나 턱이 아프지 않겠니뭐 이런 쓸데없는 걸 구해왔냐고아버지에게 따귀라도 맞지 않을는지 2013. 11. 28.
[시쓰기]밤의 버스 김정환 밤의 지방도로를 버스는 달린다잔뜩 힘 준 라이트엔 엉겨 붙는 눈발이김 서린 차창에는 누군가의 손바닥이흔들리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 있지그리고 그 뒤로는휑한 돌아봄이 긴 꼬리처럼 달라붙었다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진 않았지잊지는 않을게야내일도 도시는 반짝반짝 숨을 쉴 테고엎드린 눈 위로 아스라한 빛을 향해밤의 버스는 달려갈 테니까 201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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