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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얼룩진 양비론

by 통합메일 201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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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양비론


 


양비론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 언제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을 접한 장소는 분명히 인터넷 정치토론 게시판이었다. 그곳에서 <양비론>이라는 것은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단어였다. 그리고 그 단어는 대개의 경우 <어설픈>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했다.


<어설픈 양비론>. 단순히 양자를 비판한다는 가치중립적인 개념이 그런 식으로 수식되면서 그것은 특정 목표의 가치를 향해 망설임 없이 발사되는 총알 같은 존재가 되었다. 즉 그것은 양비의 논리를 펼치는 이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 행위에 조롱을 보내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나의 눈에 그런 세태는 무척이나 불편한 것이었다.


그 불편의 근원은 당연히 <어설픈 양비론> 위에 숨은 <진영논리>였다. 정치적 영역의 특수성을 내세워 양자택일의 선택지만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주장의 소유자들에게 <어설픈 양비론>이라는 단어처럼 달콤한 유혹을 선사하는 낱말로 드물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한쪽은 옳고 한쪽은 그른 것이다. 둘 다 그르다 하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만큼 당신은 하다못해 덜 그른 쪽을 선택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펼쳐 나가는 와중에 누군가 나타나서 원칙주의에 입각해 그래서 틀린 건 분명히 틀린 것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을 하면 그에게는 가차 없이 <어설픈 양비론>이라는 철퇴가 내려진다.


물론 선택의 대안이 충분치 못한 현실적 상황을 고려할 때 각기 다른 수준의 그름을 가지고 있는 양자를 동등하게 간주하고 양자 중에 절대 어느 쪽도 택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무책임하다고 비판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어설픈> 양비론이라는 것이 반드시 정치적 회의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보기에 따라서는 양비론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될 여지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정치적 회의를 보이는 태도에 <어설픈>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양비론이라고 규정하는 일은 양비론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착시킴으로써 그것이 가진 순기능의 혜택을 이 사회에서 거세해 버리는 폐해를 초래할 위험이 있고, 작금의 세태는 이미 그러한 폐해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 나의 인식이다.


양비가 가진 소중한 순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열린사회로 나아갈 원동력을 유지시켜주는 기능이다. 현실적으로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심심찮게 직면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차악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해 비판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특권을 부여한다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차악은 최선이 되고, 열린사회로 나아갈 문은 닫혀 결국 닫힌사회의 늪으로 침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양비론에 어설프다는 수식어를 붙여 배척하지 말고 되레 양비, 만비에 힘써 나아가야 할 이유이다.


비판의 수용과 반성에 인색해져가는 세태에게 그것이 곧 폐기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호소하고 싶다. 정치철학과 정치공학의 경계에 연하게나마 한 번 더 금을 덧 근다.


 


2013.06.08. 토요일 아침인데 선선하고 어머니는 거현 가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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