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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절도의 추억

by 통합메일 2013.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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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의 추억


도벽에 빠졌던 적이 있다. 무방비의 세상이라 생각했고 숨길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쉽게 부정하고 외면할 수가 없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 기분에 자만했고 부지런히 적당한 크기의 것들을 옷 속에 감추다 결국 어느 날 들켜버렸다. 잡혀버렸다. 천병관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것은 좀도둑의 법칙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결국은 나름의 해피엔딩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나를 잡은 마트직원들은 나를 물류창고에 구금했고 갖은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폭행의 직전까지 갔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나를 경찰에 넘기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그 일을 이렇게 은밀하게나마 고백해보는 일은 처음이 아닐까 한다. 매우 부끄럽고 내 인생에 치욕으로 남을 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누구에게도 그 일을 먼저 고백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 일이 전혀 회자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내가 창고로 잡혀가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몇 있었고 그 기억을 가진 아이들은 장성한 뒤에도 무력한 도물을 도살하듯 나의 아픈 부위를 잊지 않고 찔러댔다. 하기사 그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가 그것을 잊을 수 없었다. 삶의 어느 시점 이후로 나의 인생은 부끄러운 일들에 시달리는 것을 본업으로 삼아가기 시작했는데 무작위로 엄습하는 기억들 중에는 그 사건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다른 기억들과 마찬가지로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었고,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 사건에 대하여 매우 많은 디테일을 기억하고 있다. 옷 속에 음료수를 숨기로 걷다가 문득 나를 주시하고 있는 시선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의 감각, 식은땀이 배출되는 기억, 잡히던 순간, 내 목덜미를 잡은 우락부락한 손아귀의 감촉, 끌려가는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 나의 울부짖음, 그들의 분노, 그가 경찰에 전화할 때 사용했던 휴대폰, 그가 나를 때리려고 집어든 PVC 파이프, 구금된 상태에서 시도한 탈출, 각서처럼 쓰고 나온 이름.

이후로 당분간 나는 그 마트에 가지 않았다. 풀어주는 대가로 그들은 내게 다시는 오지 말 것을 요구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그곳에 갔을 때 그들은 날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고객님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들이 왜 나를 풀어주었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저 내가 별다른 처벌 없이 풀려나는 데에는 나의 타고난 누치가 한몫 했으리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나에게는 그 당시 흥분한 그들 안에 잠재된 이성과 자비를 포착하는 능력이 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경찰에 넘겨졌다면 나는 꽤 힘든 고초를 감내해야만 했을 것이다. 최근에 마트에 갔을 때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들을 볼 수 없었다. 하기사 벌써 15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긴 꼬리의 트라우마를 선사하는 사건이지만 어쩌다보니 그럭저럭 훈훈하게 쓰인 이야기가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 인생이 지나치게 어긋나는 것을 잡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역시 오글거린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이런 자기 고백이 그때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2013.06.11. 오늘은 좀 덜 더우려나? 시간여행을 했더니 머리가 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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