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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65

[시쓰기]여기는 잔잔하다 2 김정환 유리와 칼이 날카로운 이유는 차가운 소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뜨거움에 시달리던 이들은 고향에 돌아온 부상병처럼 입 다문 소리를 냈다가느다란 불빛 새어나오던 부엌에서 아버지가 내려놓는 소주잔 소리신경질을 내고는 복숭아를 깎으려고 동생이 집어든 과도 소리마음이 아픈 것은 오직 그 때문이다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에서 마음은 늘 바다를 꿈꿨다모든 것을 집어삼키고야 말겠다.물속에 누워 눈부신 멍울들의 출렁임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잠이 왔다이따금 낯익은 소주잔이나 과도가 나를 지나 심해의 바닥으로 침전해 갔다마음은 어떤 소리로 만들어졌을까그 온도를 느끼기엔 나는 너무 먼 곳으로 와버렸다모든 것이 가라앉는 세상그 수면의 계단 밑에서 나는 부유한다잔잔하고잔잔하게 2013. 11. 27.
[시쓰기]우리는 모두 기억을 빚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김정환 최초의 기억은 네 살태어났을 때의 기억은 전혀 없다출생 전날 나는 대체 몇 병이나 마셨던 걸까어머니 뱃속 어디에 그 많은 술이 있었나유년시절에서 그 이야기만 쏙 빼주신 부모님의 배려란. 사랑하는 당신이 서운함이라고 써내놓은 것들왜 이렇게 생소하게 보이는 걸까이제야 좀 눈에 익어가는구만고장 난 카메라 같은 내 얼굴 앞에서당신은 그만 한숨을 푹 내쉰다. 오랜 추억을 돌아 나오는 길끝까지 붙잡지 못하고결국 마지막에 기억을 놓쳐버린 이는아마도 남들보다 유난히 많은 기억을 짊어져야 했던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누군가를 배웅해야 하는 날우리는 기억할 수 없는 시간도 함께 떠나보내지만그들을 닮은 또 다른 누군가를 기억하면서마침내 조금씩 갚아나가게 된다.우리는 모두 기억을 빚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2013. 11. 27.
[시쓰기]파리의 해탈 김정환 도서관 열람실에서 내가 손사래 쳐서 날려 보내고, 그녀가 다시 스매시해서 내 콧잔등에 영면하게 된 이 파리는 전생에 큐피드나 뭐 그런 존재였을까 그 큐피드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파리로 환생했으며 얼마나 더 선업을 쌓아야 다시 신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그녀는?옷깃이 스치는 것은 몇 만 번의 인연이라는데 파리를 주고받은 인연은 대체 무슨 인연을 핑퐁 거리며 살아온 것일까 놀라운 속도로 날아가는 내 시선을 피해 황급히 은폐, 엄폐하는 그녀는 마치 죽은 듯 조용하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파리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제 날개에 묻은 내 콧잔등의 개기름을 정성스럽게 닦아내고 있었다 아 해탈이여 열반이여 그 눈부신 후광이여 2013. 11. 27.
[시쓰기]언젠가 누군가가 나의 잇몸에서 돋아나지 않았을까 하는 날 김정환 빠질 것을 예감하고 불안불안 흔들리는 이처럼 나는 힘겹게 당신을 지켜나갔다 그대가 걷힌 하루를 마감하는 날이면 눅눅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양치감에 익숙해져 가노라면 처음 어머니가 내 이에 굵은 명주실을 감았을 때처럼 떨리는 턱을 다문 채로 울먹이며 잠으로 가라앉았고 이가 빠지는 꿈을 꾸지 않을까 초조해 하는 꿈을 꾸었다 이가 빠지는 꿈은 소중한 사람을 잃는 꿈이라는데 언젠가 내게 그런 얘길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친구는 어느 날 몇 번이고 이가 다시 날 수 있게 하는 기술을 개발하면 떼돈을 벌거라고, 어쩌면 이미 기술을 있는데 치과업계에서 돈을 벌려고 공개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는 비밀을 털어놨다 이름 없는 미스 코리아의 앞니를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나는 지나치게 크게 맞장구쳤다 입 속의.. 20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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