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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65

[시쓰기]계란 김정환 처음 보거나, 참으로 오랜만에 보거나혹은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은몽달귀신처럼,앙상한 목 위에커다란 찐 계란을 얹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참 쓸데없이 많은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기도 한데또 그것은 참으로 많은 찐 계란들 위에감동과 감정을 그려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부활절을 싫어하던 어린이는계란에 무언갈 그리는 데에는여전히 영 서툰 어른이 되었다. 매끈한 계란을 앞에 두고쩔쩔매고 있으면어린이에게는 놀림과 꾸지람이,어른에게는 사회적 불이익과 빠따가비교적 친절하게 수여되었다. 사실은 못 그린다기 보다는많이 망설이는 것이다.한 번 그려버린 이목구비는결코 다시 그릴 수가 없으니까. 감동이고 감정이고억지로 무심한 척 벗겨내서는한 입에 콱깨물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러면곧너무나목.. 2013. 11. 28.
[시쓰기]별명을 짓는 저녁 김정환 고양이를 만나는 것은 역시저녁이다 별명을 지어달라고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뭐가 좋을까, 라고내가 운을 떼니 그건 정답이 아니에요, 라고첫 실연을 당한 이처럼 돌아서 버렸다 아니 아니 왜 토라지는 거니, 라고달래보려 했지만 고양이는 그만깊숙한 골목길이 되어버렸다 저만치에서 가로등과이만치에서 내가 마주하고 빛나는 것은 별명 없는골목과 추억 뿐 오늘도 나는 저녁을 품고별명을 짓는다 2013. 11. 28.
[시쓰기]무대 위의 저녁 SE 김정환 태양을 거세당한 극장나는 무대 위에 뿌리 내린 한 그루 저녁이 되었다.서로의 사타구니를 쓰다듬는 관객들 앞에서부릅뜬 조명에 의해 곱게 박제되어 있는 것.방백도 독백도 모든 대사가 다 끝났는데일렁이는 이곳을 내려갈 수가 없다.누군가는 나를 봐주리라는 생각인가.저기 극장을 나서는 연인의 권태 정도는나를 주인공으로 생각해 줄 것인가.가지를 구부려 밑동의 여명을 잘라내고 싶지만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오직 무위(無爲) 뿐이니저 태양 같은 걸 직시하여 내 눈을 태우리찢어진 시간의 틈으로 눈부신 저녁이 흘러들어왔고벙어리 별처럼 나뭇잎 한 장이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2013. 11. 28.
[시쓰기]발톱 김정환 깎아야지 하고서는 차일피일아무래도 발톱은 손톱보다는 멀다손톱깎이를 쥘 수 없어 서로에게 유세도 못 부리는 발톱은작은 빙하 몇 개가 더 녹고 나서야 손톱의 세례를 받았다 깎는 건지 분지르는 건지쇠를 닮은 꼬랑내가 스멀스멀하얗게 앉은 때가 문득 나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 근처에 노략질 나온 불개미 몇 마리한 놈이 자기 몸뚱이만한 내 발톱을 번쩍 물어올렸다저게 엄지 발톱이었나 새끼 발톱이었나생각하는 사이 벌써 몇 발자국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중간엔 친구도 만났다좋은걸 구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가발톱은 생전 처음 부러운 시선으로 올려다봐졌다 그나저나 턱이 아프지 않겠니뭐 이런 쓸데없는 걸 구해왔냐고아버지에게 따귀라도 맞지 않을는지 201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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