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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65

[시쓰기]청순한 시집 김정환 문득 시가 말라도서관 서가를 헤맸다죽은 시인의 이름 한 점 붙은앙상한 시집을 집었다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학자들의 책과 함께한 손에 움켜쥐고 다니다가오늘의 외로움이 부화하는 순간에펼쳤다책을그 시집을한 번도 읽힌 적 없어 보이는그 팽팽한 살결을 읽으며어느 시집의 순결로눈 먼 기다림을 달래는 기분은실로 너무 멀다달싹이는 내 입술에서는누군가의 숨결이끊어지지 않는 수평선을수시로 넘나드는 소리가 들렸다먼 곳에서 보내온이 편지들을 다 읽었을 때는당신의 기억도 웃으며 잠들까시를 읽는 것은멀어져가는 이의 숨결을자신의 몸속에조용히 접붙이는 사람들의 일이다. 2013. 11. 27.
[시쓰기]구원의 연애 김정환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날에는 막걸리처럼 연인이 아쉽다 사실 꼭 막걸리가 아니라도 동동주 같이 곡주기만 하면 된다 아니 하다못해 소주라도 좋겠다 그렇게, 기억하기 힘든 이름을 가진 술집에 마주 앉아 흘러내리는 세상을 바라보다 불현듯 여관으로 스며들어 최후의 섹스를 하고 싶다 그 한 모금의 공존과 하룻밤의 꿈으로 이 세상과 60 몇 억 쯤 된다고 하는 인류를 구하고 싶다. 비가 내린다 따박따박대는 비가 멈추지 않는다 그 비를 맞은 육신이나마 부지하고 있음이 다행인 것을 나는 나의 연인에게 나직하게 고백했다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무너짐을 바라보는 연인 뭉개지는 세상의 눈동자에 어떤 표정이 비칠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연인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연인의 손을 꼭 잡고 어느새 빗물이 되어버린 나의 혀.. 2013. 11. 27.
[시쓰기]무덤짓기 김정환 어느덧 우리의 시절을 긍정하고 위로해주는 말들이 범람하는, 말들이라도 범람하는 시절이 도래했습니다 한 번 구경해 본 적도 없는 인쇄소에서 태어났을 그 말들을 듣고 있자니, 읽고 있자니 한 없이 달콤하여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잠이 밀려옵니다 이 추운 도서관에서 하늘에 떠있는 에어컨 구멍을 꺼칠꺼칠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결국 미소 짓는 생을 포기하려던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새치기 하듯, 봉분을 쌓듯 책상 위에 팔을 포개고 그 틈에 얼굴을 묻습니다 몇 번이나 죽어본 적 있는 자의 능숙한, 현란한 동작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립니다 잠을 깨기 위해 일어섭니다 GPS로 위도와 경도를 계산하듯 내 나이와 D-day를 가늠하며 서가를 서성입니다 그리고 역시 책 냄새에, 그 촘촘한 향기에 배가.. 2013. 11. 27.
[시쓰기]걸어 다니는 나무 김정환 유령처럼 캠퍼스를 부유하던 나는 문득 아마존의 밀림에 서식한다는 걸어 다니는 나무를 떠올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일 년에 몇 미터씩 이동한다는 나무였다 그것은 다리가 아파서였는지도, 아니면 한 낮의 나른함이 지나치게 무거워서였는지도 모른다 불규칙하게 변해가는 인생의 동사들을 외워가면서, 내 마음 속에 한 번도 존재해 본 적 없는 규칙성을 투박한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나는 고개를 돌려 아무도 모르게 그 나무를 찾아보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어쩌면 그 나무가 내 근처까지 오지는 않았을까 뿌리를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자리를 부지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그 나무는 지각생의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모두가 사라져버린 등굣길에서, 노인들이 자신의 인생을 분갈이 하는 아파트 화단에서 그 나무를 만나게 되.. 20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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