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시현
박범신 작가의 『은교』를 읽던 도중에 서지우가 은교를 성추행 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한 부분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성추행이라는 것은 강제로 하는 키스를 의미한다. 그 문장이 만들어 내는 심상에 나는 그만 도망칠 수 없는 기억을 깨워 버렸다.
그러니까 16세의 나는 그 무엇인가에 한 없이 목이 말라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애당초 연애가 시작된 것 자체가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어서 기적과 닮은 부분이 있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 연애의 시작 보다는 끝이 더욱 자연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바로 그 꿈의 순간에서 나는 서지우처럼 키스를 시도했다. 그리고 똑같이 실패했다. 미수에 그친 것이다. 호불호와 다행의 여부를 떠나 그것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즈음 하여 연락이 설었던 그녀였고, 그날따라 괜히 할 말이 있다며 찾아온 그녀였다. 아픔만을 안겨준 모교의 조회대에서 나는 이별을 고하는 그녀에게 포옹을 구걸했다. 그녀는 그 상황에서 한 번의 자비를 베풀 아량은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나는 궁금했다. 그녀가 더 베풀 수 있는지,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는 거절당했다.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수치가 나를 포박했다. 순간적으로 온 몸에 신열이 오르는 듯 했고, 그로 인해 뇌의 일부가 타버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 분명하게 거부되는 경험이었다.>
상당한 현기증을 느끼며 마치 서둘러 쫓아버리듯이 택시에 오르는 그녀를 배웅했던 것 같다. 그녀는 얼마 뒤 나와 다시 한 번 사귀었고, 거의 곧바로 다시 나를 찼으며 (이번에도 키스 따위는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는 나의 절친한 벗과 오랜 연애를 시작했다. 덕분에 나에게 그녀의 존재는 아주 오랫동안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가 고교 말에 이르러 우연한 계기로 지금까지 그녀가 사용한 이름이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가 그녀와 친구 커플이 와해되면서 완전히 나의 범주를 떠나갔다.
오랜만에 정리를 하면서 보니 절대 잊지 않을 것 같던 기억들도 상당히 많이 흐릿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녀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사용했던 추억의 가명을 좀처럼 생각해내지 못해 한참을 끙끙대다가 포기의 문 앞에서 겨우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 창피한 기억은 아직도 불에 덴 자국처럼 화끈거렸다. 한참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인간이 틈날 때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는 그런 까닭이 아닐까.
나는 한 때 그녀를 제법 좋아했고, 그대로 두었다면 참 많이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내겐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것은 2~3년 전 어머니와 함께 시내를 걷던 도중이었다. 빼곡한 인파 속에서 야속할 정도로 똑똑히 우리는 서로를 알아봤다. 피곤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드는 순간, 나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시선의 주변에, 위축되어 가는 그녀가 보였다. 변명이지만 나의 옛 연인이자, 친구의 옛 연인에게 보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상상을 해본다. 내가 그녀에게 당신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이 중의 하나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20130615 창피는 꺼내도 꺼내도 끝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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