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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34

[시쓰기]밭 만드는 날 김정환봄에는 고추밭을 만든다끊어질 듯 이어진 줄을 할머니가 걸어가면나는 그 자국에 발맞추어 비료를 뿌린다성겁게 혹은 촘촘하게 그렇게 땅은 기름지게널뛰는 포말을 보고 있노라면시선을 타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도 뿌려진다지워지지 않는 것들, 사실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것들추위도 더위도 세대의 보폭 밑으로 스며들어 지하수가 된다나도 이젠 제법 하는구나 싶어 하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목적을 잃고 산개하는 질소와 인산과 고토와 칼슘할머니의 청춘 즈음에 우두커니 서서 오랜만에 고개를 든다어느새 그곳에는 하늘이 있다. 끝나지 않은 세상이 있다그래서 나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뿌려야 할 비료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 까닭이다 2013. 11. 28.
[시쓰기]별명을 짓는 저녁 김정환 고양이를 만나는 것은 역시저녁이다 별명을 지어달라고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뭐가 좋을까, 라고내가 운을 떼니 그건 정답이 아니에요, 라고첫 실연을 당한 이처럼 돌아서 버렸다 아니 아니 왜 토라지는 거니, 라고달래보려 했지만 고양이는 그만깊숙한 골목길이 되어버렸다 저만치에서 가로등과이만치에서 내가 마주하고 빛나는 것은 별명 없는골목과 추억 뿐 오늘도 나는 저녁을 품고별명을 짓는다 2013. 11. 28.
[시쓰기]마지막 눈 김정환 슬슬 마지막 눈이 내릴 때가 됐구나. 깜빡깜박. 엎드림 위로 쌓임이 예약되어 있다. 그리고는 밤과 불투명 유리창과 채 쌓이지도 못하고 창을 적시는 헤드라이트를 꿀꺽꿀꺽 삼킨다 어깨가 깨진 까치 까마귀가 돋아난다 무릎이 잘린 도시에는 레드카펫 대신 진흙의 소리가 깔린다 바야흐로 전야제다 문을 열면 입을 벌린 냄새가 서있다 뒷걸음질 치다 넘어진 나를 날카로운 추억으로 난도질한다 알고 보니 구석기 시대에 유행하던 뗀석기다 최소한 간석기나 비파형동검은 기대했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까마귀들이 영혼을 쪼아 먹기 위해 기어온다 뱀보다도 느리다 기다리는 건 귀찮은 일이다 까마귀도 까치도 봄도 여름도 가을도 다음 첫 눈도. 2013. 11. 28.
[시쓰기]나는 봄비 김정환 따스한 봄날엔 해변으로 가야하는데그냥 술만 마셨어이슬이 되려고 했는데그만 봄비가 됐어유난히 정직한 계절에달콤한 물방울이 되어 세상을 적셔 소리도 없이 나는 기름칠을 해머리하러 가는 버드나무와흐느끼는 아스팔트즐겨찾기해 놓은 버스 타이어에까지 말야 어김없이 돌아온 봄은내 몸과 마음 사이의어디쯤엔가 있어서으스러지도록 껴안아도결코 터뜨릴 수 없는 것이란다 화가 나서 노래를 하지만이미 젖은 봄 위엔아무것도 쓰여지질 않아터벅터벅 황홀한밤길을 걸어꿈으로 갈 뿐이야 그렇게 인주 묻지 않은밤이 지나면결국 시큼함만 남기고나는뚝 껄떡임이 멈추기도 전에땅은 표정을 잃고벚꽃은 이슬마저 털겠지 하루 종일 사랑했으니고지식한 하늘에도작은 떨림 정도는 남을게야요동치는 봄을 덮고나는 이제 눈을 감아 다음 추억에서는누구의 가슴에서.. 201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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