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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34

[시쓰기]무대 위의 저녁 SE 김정환 태양을 거세당한 극장나는 무대 위에 뿌리 내린 한 그루 저녁이 되었다.서로의 사타구니를 쓰다듬는 관객들 앞에서부릅뜬 조명에 의해 곱게 박제되어 있는 것.방백도 독백도 모든 대사가 다 끝났는데일렁이는 이곳을 내려갈 수가 없다.누군가는 나를 봐주리라는 생각인가.저기 극장을 나서는 연인의 권태 정도는나를 주인공으로 생각해 줄 것인가.가지를 구부려 밑동의 여명을 잘라내고 싶지만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오직 무위(無爲) 뿐이니저 태양 같은 걸 직시하여 내 눈을 태우리찢어진 시간의 틈으로 눈부신 저녁이 흘러들어왔고벙어리 별처럼 나뭇잎 한 장이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2013. 11. 28.
[시쓰기]항이루호르몬 김정환 취한다.초등학교 때는 친했던 이들과십년 만에 만나 벌이는 시사토론나는 오 분에 한 번씩 오줌이 마려웠다.소변기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1급수처럼 맑은 오줌줄기를 바라봤다.“이게 다 항이뇨호르몬이 안 나와서 그래.”13개의 과목 중 오직 생물만 좋아하던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그래 알콜이 항이뇨호르몬 꼭지를 잠가 버렸구나.근데 가끔은 항이루호르몬 꼭지도 잠그는 모양이다.이건 아마 내과겠지.아니 어쩌면 비뇨기과인가.아무튼 어디든 이렇게 말하지 않겠냐.“가끔은 눈물을 배출해 주시는 것도 건강상 나쁘지 않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내 그럼 안심해도 되겠군요.고백컨대 나는 가끔 술에 취해오랫동안 참고 있던오줌 같이 맑은 눈물을 질질 싸곤 한다. 2013. 11. 27.
[시쓰기]형상기억시간(形象記憶時間 김정환 이상하게도 적어두었던 이상한 시들을 파일로 만드는 이상한 짓으로 이상한 기분을 해소해보려는 이상한 시도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무런 성과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는 거인이 되지는 못 하더라도 내 썩은 몸뚱이의 지방 한 조각이 깨어져 나가는 소리 정도는 제법 명쾌하게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던 젬병아리 포부는 총총총거리며 나의 등 어딘가를 찔러대는 만성적인 질병에 의해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듯이 “엄마”하면서 붕괴되었다. 이따금씩은 저 멀리 몇 만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빨래 건조대나, 몇 만 광년 정도가 걸릴 것 같은 냉장고에 드리운 시간의 이름을 중얼거림으로써 나의 목소리를 확인한다. 눈금 하나 없는 시간을 정확히 12등분하고 24등분하는 낮과 밤이 행여나 나의 성대마저 도려내.. 2013. 11. 27.
[시쓰기]없는 편지 김정환 푸르른 네게 쓴다.하지만 이것은 없는 편지다. 깊이 팬 나에게 쓴다.하지만 이것은 없는 편지다. 너에게 쓰는 편지에는 내가 없다.도서관에서 풀어본 사랑의 계산식과내 안에서 순식간에 기화하는 그 모습이,꿈속에서 떠난 여행지와그 아래 함께 머물고 싶던 여명과우주에 그려진 너의 궤적이한 획도 담기질 않았다. 나에게 쓰는 편지에는 네가 없다.내가 죽어야 할 이유와세상을 긍정하게 하는 거짓말,모든 존재를 하찮게 만드는 고귀함,이성의 분장을 하고 춤추는 감성,부끄러운 줄 모르고 길기만 하던 밤이꾹꾹 말라붙어 있을 뿐이다. 언제쯤 나는너에게 나를,나에게 너를적을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는같은 편지에서 만날 수 있을까. 20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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