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2007년 할짓없어서 다녀온 전국반주(全國半走) #.17 (16日 영천)(Bicycle Travel)

8시쯤 눈을 뜹니다.

럭셔리한 욕실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짐을 싸는 데,

아침부터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네요.

뭐 내용의 요지는

"영천에 갔다면, 큰집인데, 그냥 지나치는 건 예의도 아니고 큰어머니 꼭 뵙고 가도록 해라"

아뿔사..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그냥 패스하려고 했던 걸 어찌아셨는지;;

"어릴 때 가보고 않가봐서 길을 잘 모르는 데요.. 거기 시골이잖아요;"

그랬더니 육군삼사관학교 근처에 가서 물어보라고 주소를 가르쳐주십니다.

아.. 이렇게 되면 천상 큰집으로 가야겠네요.

10:30

큰집으로 가야한다는 것은 이제 형과도 헤어져서 각자 홀로 자신의 라이딩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지요.

그런 생각이 들자 왠지 서먹서먹한 공기가 주위를 맴도는 것 같습니다.

일단 아침을 먹고 가는 데 까지 함께 가다가 헤어지기로 합니다.

영천시장에 다시 들어가서 밥 먹을 곳을 찾습니다.

3일동안 하루도 국밥류를 않 먹은 적이 없어서.. 좀 다른 것을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김치찌개하는 집을 찾는 데 간신히 한 곳 찾았습니다.

8,000

형이 참 싸다고.. 당신도 식당을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남는 게 없을 텐데..

라며 착한 가격에 감동을 하십니다.

식사를 마치고 사장님께 지도를 들이밀며 삼사관학교방향과 오늘 형님이 향하실

포항쪽을 여쭤보니 삼사관학교까지는 함께 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아침 점검을 해봅니다.

눈 옆에 뭐가 났군요.

좋은 데서 잘수록 피부가 더 않 좋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 한시간 여를 달려서 삼사관학교에 도착..

교전(校前)의 작은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이별을 준비합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형.'

집에 가고 나중에 또 보자라는 말을 뒤로 하고 형은 포항을 향해서 멀어져 갑니다.

자.. 이제 저도 큰집 찾아 떠나야지요;;

삼사관학교 서문을 지나서..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계속 달립니다.

어릴적에 차 유리창을 통해서 바라본 풍경들이 이따금씩 기억과 겹쳐지는 게

일종의 찌릿찌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그 역시도 어디까지나 '어릴적의 기억'인지라..

일정부분 이상들어가니.. 길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많이 들어갔나' 싶기도 하고.. '지나온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해서 중간중간 동네 어르신들께 여쭤보니 다행히도 지나온 것은 아니라고 하시네요.

12:30

결국엔 큰집 큰처까지 가서 동네 어르신들께 돌아가신 큰아버지 함자를 말씀드리고

물으니 바로 저기라고 가르쳐주셔서 큰집을 찾게 됩니다.

아 큰집 찾아가기 되게 힘드네요.

큰집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이 대문 앞의 텃밭이었는 데..

이 밭이 이렇게나 반가울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나 않 계시면 어쩌나 하고 대문을 밀며 들어가니..

다행히도 큰어머니께서 마당 수돗가에 앉아 식칼을 닦고 계시네요.

"누구나? 봉준이가?"

"아하하하, 큰어머니 정환이요~!"

하고 인사를 드리니 환하게 반겨주십니다.

왠일이냐, 혼자왔냐, 느 아버지는, 어떻게 왔냐.를 막 물어보십니다.

그런데..

큰어머니께서 춘추가 90을 바라보시고 경상도 토박이 이신지라..

의사소통의 벽이라는 장애물이 있어서..

"혼자 자전거 여행을 하다 집에 가는 길에 영천을 지나게 되어 큰어머니 생각이 나서 들렸다"

라는 내용을 전달해드리기가 엄청나게 힘듭니다;;

아무튼 큰집에 왔으니.. 일단 밥부터 주시려는 지..

자연스럽게 식사준비를 하시는 데..

계속 뭐라고 물어오시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도.. 해석이 안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제가 해석을 해서 대답을 해도 이해를 못 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뭐..

뭐 일단은 그렇게 의사소통이 안되니;;

잠시 정적이 흐르게 되네요.

의사소통의 벽을 어떻게 뚫어야하나 고민하며 안방에 다소곳하게 앉아

큰어머니께서 주신 살구를 먹는 데.. TV위에 올려진 액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좌측맨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1.큰아버지, 큰어머니 사진
2.작은형수, 작은형, 조카우성이, 큰아버지, 조카 봉준이형, ??
3.작은형, 큰어머니, 작은형수
4.작은형, 큰어머니, 작은형수, 큰아버지, 큰형수, 큰형

되시겠습니다.

대충 눈치채셨듯 저희 집이 촌수의 부조화 현상이 있는 지라;;

아무튼 근데 저 사진을 보다 보니.. 왠지 문득.. 자꾸 아까부터

큰어머니께서 '봉준이 봉준이'하시던 게 마음에 걸립니다.

흠;;

아무튼 큰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여전히 의사소통은 안되는 데.. 그 와중에 "느 아버지 뭐 하나?"라고 물어보시는 것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가 있어서, 급 반가운 마음에.. 대답을 합니다.

"저희 아버지 뭐 일하시죠 공무원이잖아요?"

자신있게 대답했건만.. 큰어머니께서 조금 멍하니 쳐다보시면서 갸우뚱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 이내 고개를 숙이고 밥을 잡수시면서..

"맞나.. 일하나?" 하면서 방긋 웃어주십니다.

뭔가 이거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만 아무튼 잘 먹고.. 구들장이 편했던지 안방에 틀어박혀 TV를 보다가..

이른 대낮부터 잠이 들었습니다.

"따르르르르르르릉"

잠결에 머리맡에 전화기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대낮에 잠을 자서 그런지 반쯤 혼수상태인지라..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군요.

큰어머니께서 일찌감치 받아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통화내용을 들어보니 거제도 사시는 작은 형수님이신가보군요..

며느리가 시어머님께 전화드린거죠..

그런데..

"봉준이가 왔다 아니가 봉준이"

정확하게 들었습니다. '봉준이가 왔다' 눈이 번쩍 떠지면서...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모든 의혹이 다 설명이 됩니다.

큰형님은 정년퇴직 하셨으니.. 정년퇴직한 사람이 일한다고 하니까 뭔가 좀 갸우뚱하셨던거고..

큰어머니께서는 지금까지 저를 조카 정환이가 아니라 손자인 봉준이 형으로 알고 계셨던

거였습니다. 이건 무슨 반전 드라마도 아니고 말이죠;;

황급하게 큰어머니께 설명을 드리지만.. 통 이해를 못 하십니다.

결국은 전화를 바꿔서 작은 형수랑 얘기를 합니다.

아까 큰어머니께 말씀드리려고 했던 그

"혼자 자전거 여행을 하다 집에 가는 길에 영천을 지나게 되어 큰어머니 생각이 나서 들렸다"

내용을 말씀드리고.. 아무래도 저를 봉준이형을 알고 계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까

한바탕 크게 웃으시네요.

아.. 저는 피 말랐단 말입니다.

결국은 작은 형수의 통역(?)을 통해서 큰어머니께 자초지종을 설명드릴 수 있었고

그제서야 큰어머니께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을 먹는 데 이거 좀 삼엄하군요.

아까는 마늘가져가라고 자전거 싣고가라고 막 그런 말씀도 하셨는 데;;

'손자'가 한순간에 '조카'로 바뀌어버린 충격이 제법 크셨던 모양입니다.

아.. 그냥 손자 노릇하다가 갈껄 그랬나 싶기도 하네요.

저녁을 먹고는 TV를 보고 있는 데 큰어머니께서 챙겨보시는 드라마가 있군요?

KBS의 하늘만큼 땅만큼입니다.

저도 집에서 이따금씩 보던 거라서 큰어머니와 함께 하하호호하면서

가끔 첨언도 하면서 맞장구도 치면서.. 그렇게 재미나게 봤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언어의 장벽이 많이 옅어져 있음을 느끼네요.

아.. 감동입니다.

연속극이 끝나고 9시 뉴스를 채 다 보지 못하시고 큰어머니께서는 잠이 드셨습니다.

잠 불편하실까봐 저도 얼른 불끄고 TV끄고 눈을 감네요.

그러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나서 핸드폰을 켜고 문자를 씁니다.

'엄마큰어머니가날봉준이형으로아셨어;근데다행히지금은정체가들통났어'라고 썼습니다.

문자보고 웃으실 어머니 얼굴이 생각나니 좋네요.

MP3를 귀에 꽂고 자우림의 '샤이닝'을 연속반복재생으로 들으면서 잠을 청합니다.

주행거리:14.23Km
주행시간:1시간3분14초
평균속도:13.50Km/h
최고속도:35.48Km/h
누적주행거리:1243.12Km
사용금액: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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